[일분소설] 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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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는 엘이 예뻤던 시절을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때 엘은 열 여덟 살이었다. 엘은 미대 지망생이었고, 이미 반쯤 미대생같은 기분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케이는 엘의 숱많은 검은 머리칼과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화첩을 좋아했다. 학교 별관의 옥외계단에서 엘은 케이에게 화첩을 보여주었다. 그속에는 엘처럼 풍성한 검은 고수머리를 한 여자와 하이에나와 하얀 말들이 있었다. '이 화가의 그림을 보면 꼭 내가 그린 것 같아.' 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보다 일 년 일찍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둘 사이에 연락은 곧 끊겼다. 몇 년이 지난 후 케이는 압구정의 혼잡한 커피 체인점에서 엘을 보았다. 흡연실과 금연실을 가르는 유리벽 너머에 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케이는 유리벽을 두들겼다. 엘이 고개를 들었다. 불과 삼십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케이는 엘이 있는 금연실로 건너갔다.

어떻게 지내?
회사 다녀요.
회사?
웹디자인. 벌써 사년차예요.

그때 엘이 기다리던 남자친구가 왔다. 케이와 엘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둘은 약속을 잡아 다시 만났다.

일은 어때?
뭐 다 그렇죠. 별로 재미는 없지만, 적응되서 그럭저럭 다닐 만 해요.
계속 그쪽 일 할 생각?
음. 그런데 이쪽 일 오래는 못 해요. 나이 좀더 들면 경영 쪽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육아에 전념할까.

엘은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심결에 케이는 말했다.

네가 좋아했던, 그, 레오노라 캐링턴, 나도 화집 사려고 애썼는데.
와. 언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케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캐링턴의 그림은 이제 더이상 엘이 그릴 법한 그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엘을 더 좋아할 것이다. 엘은 사교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둘은 몇마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날 케이가 말하지 못한 것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엘의 졸업 전시회에 갔던 일이다. 엘의 작품 제목은 '세계의 끝'이었다. 때 케이는 그 작품이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사랑스럽고 아픈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전날 밤에 꾸었던 꿈이다. 꿈 속에서 엘은 까만 머리칼을 휘날리며 빙글 돌았다. 한강 변에 있는 지상전철 플랫폼이었다. 엘의 몸 위에서 햇살이 반짝거렸다. 언니, 언젠가 내가 세계의 끝을 보여줄게요. 그리고 엘은 플랫폼 아래 철로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전철이 굉음을 내며 역으로 들어왔다.



by 타륜 | 2009/09/11 02:48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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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퀴리부인 at 2009/09/11 15:45
엘은 현재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하고 웨이브 넣었을 것 같아요.
까만머리 엘은 세계의 끝에서 그림 그리고 있구요.
Commented by 타륜 at 2009/09/13 01:06
아. 좋은 이야기--

생각못했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아요.
Commented by 시프 at 2009/09/12 11:38
검색해 봤어요. 레오노라 캐링턴. 이런 그림이었군요. 후후.
Commented by 김리츠 at 2009/09/13 00:58
캐링턴 그림 저도 찾아봤어요. 이 화가가 캐링턴이었군요. 와. 화집 있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 그림으로 벽지를 둘러도 멋있을 것 같고...굉장히 다채로운 꿈을 꿀 것 같잖아요.

Commented by 타륜 at 2009/09/13 01:07
검색하면 어떤 그림이 뜰까 궁금해서
다음에 넣어보았더니
제일 처음에 내 블로그가 뜨더라....;;;
Commented by 김리츠 at 2009/09/13 12:45
그런 식으로 뜨는 이글루스 게시물, 굉장히 많아요/ㅂ/
타륜 님 이글루스에서 보고 정보 더 찾으려고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바로 타륜 님 이글루스가 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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