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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분소설을 올렸습니다. 영영 못 올릴 것 같았건만.
키워드 보내주셨던 분들에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회중시계'와 '한강'은
몇시간 전에 올린 첫 버전에서
약간 수정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특히 회중시계가) 의도와 달리 읽힐 가능성이 있더군요.
  
by 타륜 | 2009/09/11 04:48 | 트랙백 | 덧글(11)
[일분 소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마리스님이 주신 키워드


 "난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싫어해요."
 "그런데 왜 계속 마시나요?"

 나는 손에 든 스티로폼 컵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커피를 세 시간 가까이 홀짝이고 있었다.

 "사실 커피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시럽이나 설탕이 들어가면 더 견딜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언제나?"

 나는 느릿하게 발음했다.
 "아마, 내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은 없었다.
 "맞아요.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내게 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늘."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단골 카페에서 얼마 전까지 알바생으로 일했다. 오늘 낯설고 더러운 서해바다가 보이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힘든 일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답례로 내가 말한 것은, 조금 뜬금없게도, 아메리카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눈에서 손을 내리자, 그녀는 바스락거리며 작은 노트를 내밀었다.
 "아, 이거, 오늘 예뻐서 샀는데, 드릴게요."


헤어져 돌아오는 길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노트가 비에 젖을까 걱정되어 겉옷 안에 감싸고 걸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 알 수 없다. 오늘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고, 그녀가 내게 준 것은 작은 노트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것을 말한 것처럼,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건네 준 것처럼 느껴진다. 퍼붓는 빗 속에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방에 들어가 물기를 닦아내고 오늘을 적을 수 있도록.


by 타륜 | 2009/09/11 03:06 | Original Fiction | 트랙백 | 덧글(3)
[일분 소설] 창문
마리스님이 주신 키워드



"아가, 창문을 열어선 안된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는 안되는 일은 많았고, 그 이유를 내가 일일이 알 수는 없었다. 언제인가 나는 물었다. 왜 창문을 열어서는 안되나요? 이웃집과 너무 붙어 있거든. 이웃집에서 우리 집을 들여다보면 좋지 않으니까.

"매일 밤 무언가 창문을 두들겨요."
"신경쓰지 마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간유리로 된 이중창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다. 어느날 서랍에서 오래전에 가지고 놀던 프리즘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 손바닥 위에서 일어서던 작은 무지개들이 떠올랐다. 나는 창문으로 다갔다. 잠금쇠를 밀어올렸지만 오래도록 닫혀 있던 창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세게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이 활짝 열렸다.

이웃집은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았다. 고요한 한길 건너편에야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엄마. 나는 뒤돌았다. 

집 안 가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기억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저 창문에서 목을 매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죽었는지, 혹은 몇 살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집의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나는 헛되이 손잡이를 돌리다가 느리게 창문으로 향했다. 어찌되었든 시험해 볼 생각이다. 이층에 있는 이 창문에서 떨어져 다친다면, 피가 흐르고 아프다면, 나는 살아 있는 거겠지. 창문 가득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맞은 편 집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았다.

  
by 타륜 | 2009/09/11 02:57 | Original Fiction | 트랙백 | 덧글(2)
[일분소설] 세계의 끝

김리츠님이 주신 키워드


 케이는 엘이 예뻤던 시절을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때 엘은 열 여덟 살이었다. 엘은 미대 지망생이었고, 이미 반쯤 미대생같은 기분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케이는 엘의 숱많은 검은 머리칼과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화첩을 좋아했다. 학교 별관의 옥외계단에서 엘은 케이에게 화첩을 보여주었다. 그속에는 엘처럼 풍성한 검은 고수머리를 한 여자와 하이에나와 하얀 말들이 있었다. '이 화가의 그림을 보면 꼭 내가 그린 것 같아.' 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보다 일 년 일찍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둘 사이에 연락은 곧 끊겼다. 몇 년이 지난 후 케이는 압구정의 혼잡한 커피 체인점에서 엘을 보았다. 흡연실과 금연실을 가르는 유리벽 너머에 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케이는 유리벽을 두들겼다. 엘이 고개를 들었다. 불과 삼십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케이는 엘이 있는 금연실로 건너갔다.

어떻게 지내?
회사 다녀요.
회사?
웹디자인. 벌써 사년차예요.

그때 엘이 기다리던 남자친구가 왔다. 케이와 엘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둘은 약속을 잡아 다시 만났다.

일은 어때?
뭐 다 그렇죠. 별로 재미는 없지만, 적응되서 그럭저럭 다닐 만 해요.
계속 그쪽 일 할 생각?
음. 그런데 이쪽 일 오래는 못 해요. 나이 좀더 들면 경영 쪽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육아에 전념할까.

엘은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심결에 케이는 말했다.

네가 좋아했던, 그, 레오노라 캐링턴, 나도 화집 사려고 애썼는데.
와. 언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케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캐링턴의 그림은 이제 더이상 엘이 그릴 법한 그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엘을 더 좋아할 것이다. 엘은 사교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둘은 몇마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날 케이가 말하지 못한 것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엘의 졸업 전시회에 갔던 일이다. 엘의 작품 제목은 '세계의 끝'이었다. 때 케이는 그 작품이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사랑스럽고 아픈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전날 밤에 꾸었던 꿈이다. 꿈 속에서 엘은 까만 머리칼을 휘날리며 빙글 돌았다. 한강 변에 있는 지상전철 플랫폼이었다. 엘의 몸 위에서 햇살이 반짝거렸다. 언니, 언젠가 내가 세계의 끝을 보여줄게요. 그리고 엘은 플랫폼 아래 철로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전철이 굉음을 내며 역으로 들어왔다.



by 타륜 | 2009/09/11 02:48 | Original Fiction | 트랙백 | 덧글(6)
[1분소설] 검은 원피스
하누님이 주신 키워드


"넌 원색 옷만 입더라."
"그래서 슬슬 곤란해지고 있어요. 차분한 색깔의 옷이 없으니까 공적인 자리에 갈 때면 남에게 빌려야 하거든요."
"공적인 자리?"
"뭐 아직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정도지만요."
"음...너 혹시 치마는 안 입니?"
"꼭 그런 건 아니예요. 있으면 입는데, 어쩌다 보니 옷장에 없네요."
"잠깐만."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새 것인 듯한 검은 원피스를 꺼내 들고 돌아섰다.
"이거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가질래? 사놓고 한 번도 안 입은 옷이야."
"어, 이런 거 받아도 괜찮아요?"
"괜찮아. 난 앞으로도 안 입을 거 같아."
나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봐. 잘 어울리네."

그녀는 웃었고, 그래서 나도 웃었다. 강의실 칠판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첫 수업을 듣자마자 반했고 그 뒤 이 년동안 열광적으로 좋아해왔다.  내가 수업을 들은 그 해 이후 그녀는 더이상 학교에서 강의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알콜중독 때문이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종종 그녀에게 연락을 했고 몇 번 따로 만났다. 나는 그녀의 지친 듯한 표정과 불안해 보이는 손놀림까지 사랑했다. 그리고 그날, 그녀와 처음 함께 잤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딱히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별 상관 없었다. 나는 그녀가 처음 준 선물인 옷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나는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 그녀의 죽음을 짧게 들었다. 집에서 목을 매었다고 했다. 나는 빈소에 가기 위해 그녀가 내게 준 검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by 타륜 | 2009/09/11 02:33 | Original Fiction | 트랙백 | 덧글(1)
[일분소설] 카메오 목걸이
퀴리부인님이 주신 네 개의 키워드 - 회중시계 한강 우산 카메오목걸이


"이건 외할머니의 유품이야. 어렸을 때 할머니 경대에서 이 목걸이를 보고 달라고 했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 선물받은 거라고 안된다고 하시더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어. 두 분이 처음 만나신 날은 늦여름이었는데, 시장에서 야채를 팔고 있던 열 여섯 살 할머니에게 찬 물을 가져다 주셨대. 두 분은 곧 결혼하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아주 예뻐하셔서 신혼시절에는 할머니를 업고 다니시기까지 하셨대. 그 뒤 다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할머니께서 이 목걸이를 각별이 아끼시는 것은 눈에 보였어. 병원에 입원하실 때도 목걸이를 챙기셨지."

"멋진 이야기인데."
"음. 그런데 끝은 좀 이상해."
"뭐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한동안 이 목걸이를 걸고 다녔어.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말씀하신 거야 - 할머니께서 그 목걸이 사시고 참 좋아하셨다고. 나는 놀랐지. 할아버지 선물 아니었어요? 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무슨 말씀이냐고 하시더라. 내가 유치원 들어갈 즈음에 할머니가 직접 사셨다는 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지. 혹시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 좋으셨냐고. 아니라고 하시더라. 그다지 말씀하고 싶어하는 내색이 아니었어. '네 외할아버지, 별로 좋은 분은 아니었어.' 어머니가 말씀하신 건 그것이 전부였지."
"이상하네."

"나중에 이모나 외삼촌에게 들어봐도 할아버지는 절대 할머니를 업고 다니실 분이 아니었어.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신랑 얼굴도 못 본 채 시집 오셔서 고생만 많이 하셨대. 참 이상하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시던 할머니의 표정은 진짜였는데."  


by 타륜 | 2009/09/11 02:14 | Original Fiction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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