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분 소설] 수학의 정석

 시프님이 주신 키워드 - '수학의 정석'

 

커피 잔이 컵받침 위에서 위태하게 달칵였다. 나는 떨리는 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내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어쩌다 수학문제 푸는 것이 취미가 되셨나요?”

“어느 날 기분 좋은 꿈을 꾸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조금 지나 생각났는데 숙학문제 푸는 꿈이더라구. 고등학교 때 수학 문제 풀고 있으면 좀 행복했거든. 그 기분이 떠올라서 인수분해 공식을 떠올려 봤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나. 옛날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다 까먹었다는 게 억울하더라.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부터 도서관에 가서 수학의 정석을 보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하나도 모르
겠어서 화가 났는데 오기 생겨서 하다보니까 알겠고, 몇 달 보고 있으려니, 이거 재밌더라고.”


아버지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꽤 호감을 가졌을 것이다. 나도 수학 좋아했어요, 라면서 말을 했겠지. 수학문제가 풀릴 때의 그 기분을 나도 알아요, 오 년 전 아버지가 달아난 이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너도 좋아 보인다. 예뻐졌네.”


아버지는 내게 어떻게 지내냐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루종일 수학문제를 풀며 여유롭게 지낼 동안 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상하고 끔찍한 곳에서 일했답니다. 고등학교에서 짤리고 대학도 휴학 후 돌아가지 못했어요. 사업에 실패한 건 아버지인데 실패자는 저 같네요. 나는 키득대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면 흉기는 수학의 정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by 타륜 | 2009/11/18 17:56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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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분소설을 올렸습니다. 영영 못 올릴 것 같았건만.
키워드 보내주셨던 분들에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회중시계'와 '한강'은
몇시간 전에 올린 첫 버전에서
약간 수정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특히 회중시계가) 의도와 달리 읽힐 가능성이 있더군요.
  
by 타륜 | 2009/09/11 04:48 | 트랙백 | 덧글(12)
[일분 소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
마리스님이 주신 키워드


 "난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싫어해요."
 "그런데 왜 계속 마시나요?"

 나는 손에 든 스티로폼 컵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커피를 세 시간 가까이 홀짝이고 있었다.

 "사실 커피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요. 시럽이나 설탕이 들어가면 더 견딜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언제나?"

 나는 느릿하게 발음했다.
 "아마, 내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시 한번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은 없었다.
 "맞아요.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내게 하고 싶었어요, 언제나, 늘."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단골 카페에서 얼마 전까지 알바생으로 일했다. 오늘 낯설고 더러운 서해바다가 보이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힘든 일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답례로 내가 말한 것은, 조금 뜬금없게도, 아메리카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눈에서 손을 내리자, 그녀는 바스락거리며 작은 노트를 내밀었다.
 "아, 이거, 오늘 예뻐서 샀는데, 드릴게요."


헤어져 돌아오는 길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노트가 비에 젖을까 걱정되어 겉옷 안에 감싸고 걸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 알 수 없다. 오늘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고, 그녀가 내게 준 것은 작은 노트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아주 많은 것을 말한 것처럼,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건네 준 것처럼 느껴진다. 퍼붓는 빗 속에서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방에 들어가 물기를 닦아내고 오늘을 적을 수 있도록.


by 타륜 | 2009/09/11 03:06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3)
[일분 소설] 창문
마리스님이 주신 키워드



"아가, 창문을 열어선 안된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는 안되는 일은 많았고, 그 이유를 내가 일일이 알 수는 없었다. 언제인가 나는 물었다. 왜 창문을 열어서는 안되나요? 이웃집과 너무 붙어 있거든. 이웃집에서 우리 집을 들여다보면 좋지 않으니까.

"매일 밤 무언가 창문을 두들겨요."
"신경쓰지 마라."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간유리로 된 이중창문은 언제나 닫혀 있었다. 어느날 서랍에서 오래전에 가지고 놀던 프리즘을 발견하기 전까지.

 내 손바닥 위에서 일어서던 작은 무지개들이 떠올랐다. 나는 창문으로 다갔다. 잠금쇠를 밀어올렸지만 오래도록 닫혀 있던 창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세게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이 활짝 열렸다.

이웃집은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았다. 고요한 한길 건너편에야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엄마. 나는 뒤돌았다. 

집 안 가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기억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저 창문에서 목을 매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죽었는지, 혹은 몇 살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집의 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나는 헛되이 손잡이를 돌리다가 느리게 창문으로 향했다. 어찌되었든 시험해 볼 생각이다. 이층에 있는 이 창문에서 떨어져 다친다면, 피가 흐르고 아프다면, 나는 살아 있는 거겠지. 창문 가득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맞은 편 집에서 누군가 나를 바라보았다.

  
by 타륜 | 2009/09/11 02:57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2)
[일분소설] 세계의 끝

김리츠님이 주신 키워드


 케이는 엘이 예뻤던 시절을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때 엘은 열 여덟 살이었다. 엘은 미대 지망생이었고, 이미 반쯤 미대생같은 기분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케이는 엘의 숱많은 검은 머리칼과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화첩을 좋아했다. 학교 별관의 옥외계단에서 엘은 케이에게 화첩을 보여주었다. 그속에는 엘처럼 풍성한 검은 고수머리를 한 여자와 하이에나와 하얀 말들이 있었다. '이 화가의 그림을 보면 꼭 내가 그린 것 같아.' 엘이 그렇게 말했을 때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보다 일 년 일찍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둘 사이에 연락은 곧 끊겼다. 몇 년이 지난 후 케이는 압구정의 혼잡한 커피 체인점에서 엘을 보았다. 흡연실과 금연실을 가르는 유리벽 너머에 엘이 마주 앉아 있었다. 케이는 유리벽을 두들겼다. 엘이 고개를 들었다. 불과 삼십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케이는 엘이 있는 금연실로 건너갔다.

어떻게 지내?
회사 다녀요.
회사?
웹디자인. 벌써 사년차예요.

그때 엘이 기다리던 남자친구가 왔다. 케이와 엘은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둘은 약속을 잡아 다시 만났다.

일은 어때?
뭐 다 그렇죠. 별로 재미는 없지만, 적응되서 그럭저럭 다닐 만 해요.
계속 그쪽 일 할 생각?
음. 그런데 이쪽 일 오래는 못 해요. 나이 좀더 들면 경영 쪽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육아에 전념할까.

엘은 웃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심결에 케이는 말했다.

네가 좋아했던, 그, 레오노라 캐링턴, 나도 화집 사려고 애썼는데.
와. 언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케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캐링턴의 그림은 이제 더이상 엘이 그릴 법한 그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엘을 더 좋아할 것이다. 엘은 사교적이고 세련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둘은 몇마디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날 케이가 말하지 못한 것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엘의 졸업 전시회에 갔던 일이다. 엘의 작품 제목은 '세계의 끝'이었다. 때 케이는 그 작품이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사랑스럽고 아픈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전날 밤에 꾸었던 꿈이다. 꿈 속에서 엘은 까만 머리칼을 휘날리며 빙글 돌았다. 한강 변에 있는 지상전철 플랫폼이었다. 엘의 몸 위에서 햇살이 반짝거렸다. 언니, 언젠가 내가 세계의 끝을 보여줄게요. 그리고 엘은 플랫폼 아래 철로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전철이 굉음을 내며 역으로 들어왔다.



by 타륜 | 2009/09/11 02:48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6)
[일분 소설] 우산

퀴리부인님이 주신 네 개의 키워드 - 회중시계 한강 우산 카메오목걸이


손바닥 위에 닿는 빗방울이 굵었다. 공기는 엷은 갈색으로 어둑했다. 오후 세 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해거름 같은 분위기였다. 비줄기는 더 거세질 것이다. 희진은 난감한 기분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세 시의 학교는 고요하다. 우산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숙직실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은 모두 독한 감기약 때문이다. 몽롱한 나머지 별관 독서실에서 계속 자버린 것이다.
 
그때 투명한 우산이 희진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거 쓰고 가.”
희진은 뒤를 쳐다보았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음,”
“야 왜 그래. 너 나 몰라?” 

희진은 머쓱해졌다. 길고 까만 속눈썹. 길고 가는 눈매. 그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당연히 알지. 고마워.”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갈까?”

둘은 어깨을 나란히 하고 걸었다. 희진은 말했다. 이상하게 행복하네. 왜? 어쩌면 감기약 때문일지도. 뭐야 그게. 둘은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희진은 자신의 학교 어디에도 그런 얼굴을 가진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by 타륜 | 2009/09/11 01:59 | 1분 소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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